"난 이유가 필요해요. 발걸음 하나를 옮기는 데도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세상이 좀더 내게 친절하고, 나는 훨씬 여유롭고요. 내가 웃으면 주변이 함께 밝아지고, 또 화가 날 땐 일시에 같이 암전되면 좋겠어요. 그럼 좋을 것 같아, 다 괜찮아질 것만 같아. 언니는 어때요?"
나는 전보다 더 무뚝뚝한 목소리, 짓궂은 표정으로 뒷걸음질쳤다.
"무대가 그런 데잖아. 그러니 나 말고 다른 극장을 찾아가보시지요."
"장난으로 한 말은 아닌데, 흘려듣고 있었나보네요."
"아냐, 듣고 있어."
"아뇨. 잡지 뒤적이는 것처럼 성의가 없잖아요. 꼭 오다가다 가게 들르는 손님들처럼 그러잖아요, 지금."
지연은 잠시 창밖을 향해 서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의로 나 들으라고, 느끼라고, 사무치라고.
"내 숨통을 틔워준 사람이 날 구속해줬으면 좋겠어. 다른 건 바라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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