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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saw

페르난두 페소아,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미국 시인 레이철 블라우 뒤플레시스는 시와 산문을 구분하고, 시적 간극과 파편성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분절성이라는 말을 쓴다. 그녀에게 "시란 의미를 생성하기 위해 분절성과 간극 두기에 철저히 의존하는 담론의 형식이고, (……) 시는 간극(행 바꿈, 연 바꿈, 페이지의 여백 등)의 타협을 통해 의미 있는 시퀸스를 만들어 내는 행위를 동반한다. 반면 단편들을 선택하고, 배치하고 결합함으로써 의미를 규정하고 생산하는 능력인 분절성은 시라는 장르를 규정하는 근본적인 특징이다."

이러한 시와 분절성의 긴밀한 관계 때문에 페소아의 시에서 파편적 글쓰기가 눈에 덜 띄는 걸까? 실제로 그는 산문보다는 시를 더 많이 완성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여전히 미완성, 미발표작이 훨씬 많은 작가였다. 비평계의 찬사와 명예를 은근히 열망했던 그가 완성이나 발표를 목전에 두고도 내켜 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의 완벽주의 때문일까? 무시나 냉소, 알아보지 못할 것의 두려움이 다른 모든 욕망을 압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그저 쓰기만 했다. 동시에 밀려오는 생각의 파고들을 받아들이면서, 양 떼 아니 생각 떼의 목동으로 남기를 자처하면서, 지치지 않고 꾸준하게, 머릿속을 흐르는 작은 생각의 실타래 하나조차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완성에 번번이 실패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쓰기를 멈추는 데에도 실패했다. 그는 쓰기 위해 썼고, 구체적인 목적 없이도 썼고, 일관성 있는 사고나 논리 전개를 염려하지 않고 써 나갔다. 그래서 파편적 글쓰기는 그에게 "문제가 아니라 해결책"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무의식적인 해결책이었으리라.